
어린이 책은 어린이만 읽는 것이 아니다. 아이 손에 책을 쥐어 주는 순간, 그 책은 곧 부모의 책이 되고 교사의 책이 된다. 고현숙 작가의 단편동화집 ‘제비 똥받이 사건'(도담소리, 1만2000원)은 그런 의미에서 이중의 독자를 거느린 책이다.
아이들에게는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동화이고, 학부모와 교사에게는 “우리가 아이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되묻는 거울이다. 동화작가이자 문학박사인 함경연은 이 책을 두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게 한다”며, “이 질문이야말로 이 작가의 작품이 지닌 지속적인 문학적 가치”라고 평했다.
책에는 여덟 편의 동화가 실려 있다. 고마움을 전하려는 마음, 말없이 이웃을 돕는 사람들, 길고양이를 괴롭히다 반성하는 아이, 하늘나라로 간 엄마가 보내 준 신기한 천사, 친구의 펭수 머리핀을 허락 없이 가져가 벌어지는 소동, 소심한 아이가 어쩌다 회장이 되어 반을 훌륭하게 이끄는 이야기까지, 우리 주변에서 마주칠 수 있는 소재들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그 무게는 가볍지 않다. 그러나 결코 무겁지도 않다. 함경연의 표현처럼, 이 책의 이야기들은 “설명이 없고 드라마도 없다. 완벽한 믿음과 신뢰, 풍경과 사건은 자연스럽게 축적된다.”
처마 밑 공생, ‘제비 똥받이 사건’이 던지는 질문
표제작 ‘제비 똥받이 사건’은 이 책의 핵심 메시지를 가장 선명하게 품고 있다. 시골 처마 밑에 둥지를 튼 제비 한 쌍. 사람들은 제비를 반기면서도 그 아래 설치해야 하는 ‘똥받이’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제비를 들이려면 제비 똥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외면한 결과, 제비는 둥지를 떠나고 만다.
주인공 온선이는 새벽 일찍 일어나 대문을 활짝 열어 놓으며 제비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할머니, 대문을 활짝 열어 놓으려고요. 제비가 맘 놓고 들어오게요.” 동이 터오도록 제비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다 마침내 “째재잭 짹짹, 지지배배 지지배배!” 제비 한 쌍이 돌아온다. 이 짧은 장면이 책 전체의 주제를 압축한다. 공생은 편리함의 결과가 아니다.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태도, 즉 ‘똥받이’를 달아 두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생태적 감수성을 넘어 관계의 본질을 꿰뚫는 이야기다.
보이지 않는 손길, ‘이름 없는 택배’와 ‘내가 지켜 줄게’
이 책의 또 다른 축은 ‘익명의 선의’다. ‘이름 없는 택배’는 발신인 없이 도착하는 택배를 통해, 세상을 조용히 떠받치는 이름 없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화려하지 않아도, 알아주지 않아도 누군가를 위해 움직이는 손길이 있다는 사실. 아이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 선함이 반드시 보상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된다.
‘내가 지켜 줄게’와 ‘캣아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길고양이를 괴롭히던 아이가 반성하고 그 고양이를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이야기는, 약자를 향한 폭력이 어떻게 연민과 책임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함경연이 주목한 “유기견·장애인·길고양이 등 연약한 존재들”이 이 책에서 단순히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아닌,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적인 시선의 자리에 놓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아이의 성장, ‘어쩌다 회장!’과 ‘펭수 머리핀’
‘어쩌다 회장!’은 소심한 아이가 예상치 못하게 반장이 되어 성장하는 이야기다. 이 동화가 특별한 것은 아이를 갑자기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수하고 머뭇거리면서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아이의 모습은, 완벽함보다 용기가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조용히 전달한다. 오늘날 성과 중심의 교육 환경에 지친 아이들과 학부모들에게 이 이야기는 작은 위로이자 강한 격려가 된다.
‘펭수 머리핀’은 친구의 물건을 허락 없이 가져간 아이가 소동을 겪으며 소유와 양해의 의미를 깨닫는 이야기다. 도덕 교과서처럼 설교하지 않는다. 사건의 흐름 속에서 아이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게 만든다. 함경연이 “독자는 교훈을 전달받기보다,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며 스스로 판단하게 된다”고 평한 지점이 바로 이 작품들에서 빛난다.
‘신기한 천사’, 슬픔을 건너는 법
여덟 편 중 가장 깊은 울림을 남기는 작품은 ‘신기한 천사’다. 하늘나라로 떠난 엄마가 보내 준 천사를 통해 상실과 위로를 이야기하는 이 동화는,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의 마음에도 손을 얹는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아이의 눈높이에서 따뜻하게 풀어낸 고현숙 작가의 필력이 여기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이가 이 이야기를 읽은 뒤 부모에게 안길 때, 그 포옹의 온도가 달라질 것이다.
고현숙 작가, 46년의 교실이 빚어낸 언어
고현숙 작가는 인천광역시 강화에서 태어나 46년째 초등학교 아이들과 함께 꿈을 키워 온 현직 교사다.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 평생교육원 동화창작스토리텔링 과정을 수료하고, 2020년 KB창작동화제 당선을 비롯해 ‘아동문학사조’ 제1회 신인문학상, 제52회 한인현글짓기지도상을 수상하며 동화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슝슝이가 하는 말’, ‘그날의 약속’, ‘그날의 함성’에 이어 이번 ‘제비 똥받이 사건’까지, 그의 작품 세계는 일관되게 어린이의 삶과 그 주변을 성실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기반한다. 46년이라는 교실 경험이 이 책의 언어를 만들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다.
그림은 ‘한혜정’ 작가가 맡았다. 대학에서 만화를 공부하고 극동만화연구소에서 어린이용 만화를 그려 온 그는 ‘WHY 한국사’ 시리즈, 만화로 보는 ‘한국 설화’ 시리즈, ‘태극기 휘날리며’, ‘꽃도둑’, ‘백두산 도련님 납시오’, ‘그래, 해보는 거야!’, ‘친구가 되고 싶어!’ 등 다수의 작품을 통해 어린이 독자들에게 친숙한 일러스트레이터다. 이야기의 온기와 한혜정 작가의 그림이 만나, 이 책은 눈으로도 읽히고 마음으로도 읽힌다.
아이에게 “더불어 산다는 것은?” 묻는 책
처마 밑에 똥받이를 달아 주는 것, 이름 없이 누군가를 돕는 것, 실수한 친구를 끝까지 기다려 주는 것, 하늘로 간 엄마를 그리워하면서도 오늘을 사는 것. 이 책이 담은 여덟 편의 이야기는 모두 같은 질문을 향해 모인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정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그 질문을 스스로 품게 만든다.
‘제비 똥받이 사건’은 아이에게 사주는 책이 아니다. 아이와 함께 읽는 책이다. 책을 덮고 나서 아이가 던지는 질문 하나가, 어쩌면 오늘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대화의 시작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교보문고 : ‘제비 똥받이 사건’
예스24 : ‘제비 똥받이 사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