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화 사회 진입을 앞두고 금융권이 ‘시니어’ 고객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다. 탄탄한 자산과 구매력을 갖춘 5060세대가 핵심 소비층으로 부상하자, 은행·보험·증권을 막론하고 이들을 겨냥한 맞춤형 서비스와 상품을 쏟아내며 그야말로 ‘전쟁’을 방불케 하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단순히 금리를 우대해 주던 과거 방식에서 벗어나, 자산관리·건강·상속·디지털 교육까지 아우르는 ‘토털 라이프 케어’로 진화하는 시니어 금융의 현주소와 미래를 심층 분석한다.
왜 ‘시니어’가 VIP가 됐나?
금융권이 시니어 고객에게 주목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이들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두터운 자산가 그룹이기 때문이다. 오랜 경제 활동을 통해 축적한 부동산과 금융 자산을 보유한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가 본격적인 은퇴기에 접어들면서, 이들의 자산을 어떻게 유치하고 관리하느냐가 금융사의 미래 수익을 좌우할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과거의 고령층과 달리, 현재의 ‘액티브 시니어’는 디지털 기기 사용에도 능숙하며, 은퇴 후에도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자산을 운용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단순히 예·적금에 돈을 묻어두기보다 연금, 신탁, 투자 등 다양한 금융 상품에 높은 관심을 보인다. 통계청에 따르면 60세 이상 가구주의 순자산은 다른 연령대를 압도하며, 이들의 금융 자산 규모는 계속해서 커질 전망이다. 이는 금융사 입장에서 놓칠 수 없는 거대한 시장이 열렸음을 의미한다. 저성장·저금리 시대에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야 하는 금융사들에게 시니어 시장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셈이다.
은행권: ‘사랑방’부터 ‘디지털 가정교사’까지
시니어 고객 유치 경쟁이 가장 치열한 곳은 단연 은행권이다. 각 은행은 저마다의 브랜드 전략 아래 시니어 고객의 발길을 잡기 위한 특화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다.
KB국민은행은 ‘KB골든라이프’라는 브랜드를 중심으로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전국 주요 거점에 ‘KB골든라이프센터’를 확대 개설해 은퇴·노후 설계, 상속·증여 컨설팅은 물론 요양·돌봄 상담까지 원스톱으로 제공한다. 또한, ‘KB 시니어 라운지’라는 이동 점포를 통해 복지관 등을 직접 찾아가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며 거동이 불편한 고령층의 접근성을 높였다.
신한금융그룹은 최근 시니어 전용 브랜드 ‘신한 SOL메이트’를 론칭했다. 이는 은퇴 이후의 삶을 함께하는 동반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단순 금융 서비스를 넘어 병원 예약 대행, 치매 예방 프로그램, 재취업 연계 등 비금융 생활 밀착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모바일 앱 사용이 서툰 시니어 고객을 위해 스마트폰 화면을 보며 상담하는 ‘보이는 ARS’ 서비스도 도입했다.
하나은행은 ‘어른을 위한 은행’이라는 콘셉트로 시니어 특화점포를 운영 중이다. 경기도 고양시의 ‘탄현역출장소’는 큰 글씨 안내, 난청 어르신을 위한 ‘글로 보는 상담 서비스’, 쉬운 말 ATM 등 시니어 맞춤형 디지털 기기를 전면에 배치했다. 또한, 지역 어르신들을 위한 쉼터이자 사랑방 역할을 하는 ‘사랑채’ 공간을 마련해 금융 교육과 문화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정서적 유대를 강화하고 있다.
우리은행은 ‘시니어플러스 효심(孝心) 영업점’을 개설했다. 고령층의 방문이 잦은 지역을 중심으로 안락한 대기 장소와 시니어 전용 ATM을 설치하고, 원금보장형 상품 위주의 상담을 제공한다. 특히 어르신들의 모임 장소 및 금융 교육 장소로 활용할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을 운영하며 지역 사회와의 상생을 꾀하고 있다.
보험·증권업계도 참전… ‘노후 불안’ 정조준
시니어 모시기 경쟁은 제2금융권으로도 확산하고 있다. 보험업계는 고령층의 가장 큰 걱정거리인 ‘건강’과 ‘질병’을 정조준한다. 고혈압이나 당뇨가 있어도 가입할 수 있는 유병자 보험, 치매 진단비와 간병비를 집중 보장하는 치매 보험, 노인장기요양보험 등급 판정 시 보험금을 지급하는 간병 보험 등 시니어 특화 상품이 연이어 출시되고 있다. KB손해보험의 ‘KB골든케어 간병보험’처럼 초기 치매 단계부터 요양까지 폭넓게 보장하는 상품이 대표적이다.
증권업계 역시 시니어 고객의 자산 증식과 안정적인 인출 수요에 주목하고 있다. 미래에셋증권은 만 65세 이상 고객을 위한 전용 상담센터를 운영하며, 느리고 쉬운 말로 투자 상품을 설명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각 증권사는 은퇴 자산을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채권형 상품이나 월지급식 펀드, 주가연계증권(ELS) 등 중위험·중수익 상품을 추천하며 시니어 투자자 유치에 공을 들이고 있다.
‘빛과 그림자’… 시니어에게 미칠 영향
금융권의 이 같은 변화는 시니어 고객에게 분명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금융 접근성이 개선되고, 노후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맞춤형 서비스를 더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됐다. 복잡한 금융 용어나 디지털 기기 사용법을 차근차근 알려주는 교육 서비스는 금융 소외를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명확한 그림자도 존재한다. 과도한 유치 경쟁은 불완전판매의 위험을 높일 수 있다. 특히 ELS/DLF 사태에서처럼, 상품의 위험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고령층에게 원금 손실 가능성이 큰 고위험 상품을 권유하는 사례가 재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또한, ‘디지털’과 ‘비대면’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여전히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층이 오히려 소외감을 느끼거나, 자녀 사칭·기관 사칭 등 시니어를 노리는 금융사기 범죄에 더 쉽게 노출될 수 있다는 점도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결론적으로, 금융권의 시니어 고객 유치 경쟁은 초고령화 시대의 자연스러운 흐름이자 필수적인 변화다. 금융사들은 단기적인 수익 창출을 넘어, 시니어 세대의 삶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이들의 ‘평생 금융 파트너’가 되겠다는 장기적인 안목과 진정성을 가져야 한다. 시니어 고객 역시 쏟아지는 상품과 서비스 속에서 자신의 금융 이해도를 높이고, 위험성을 꼼꼼히 따져보는 현명한 자세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