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에 목마른 땅이 첫 빗방울을 맞는 순간을 아시나요.
메마른 흙이 촉촉해지며 내뿜는 그 향기, 시들어가던 잎새들이 고개를 드는 그 생명력을 말이다. 어느 날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바로 그런 소나기였다.
“언니, 잘 지내지?”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35년이라는 세월을 한순간에 지워버렸다. 여전히 맑고 부드러운 그 음성 속에서 나는 공무원 새내기 시절의 나를 만났다. 꿈으로 가득했던 6주간의 합숙교육, 그 시절 우리는 얼마나 순수했던가.
구례에서 올라온 그 아이를 처음 본 순간이 지금도 선명하다. 가을 들판에 피어난 구절초처럼 청초하고 단아했던 모습, 그래서 자연스럽게 ‘구례낭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만남을 앞둔 전날 밤, 나는 어린 시절 소풍 가는 아이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일은 어떤 옷을 입고 갈까, 어떤 모습으로 그 아이 앞에 서야 할까. 큰 행사들 앞에서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 나의 성격을 생각하면 지금의 이 모습이 너무나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언제부터인가 잊고 살았던 순수한 감정의 떨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주한 그 순간. 30여 년의 세월이 무색할 만큼 그 아이는 여전했다. 시간이 머물러 있는 듯한 맑은 눈빛, 변함없이 다정한 말씨,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단아함까지.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잃지 않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얼굴을 마주하고 앉은 순간, 감사함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이 만남이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 이것은 분명 창조주의 선물이었다. 힘겹고 지친 일상 속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는 수많은 마음들이 있다는 것, 사랑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한.
풋풋하고 순수했던 그 시절, 우리는 무엇을 꿈꾸었을까.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포부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소박한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서로를 아끼고 격려하며 함께 웃던 그 순간들이 지금 생각해보니 얼마나 소중했던지.
시간은 많은 것을 변화시킨다. 얼굴에는 주름이 생기고, 머리에는 흰머리가 섞이며, 때로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타협하며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진정한 아름다움은 시간을 초월한다. 구례낭자의 변함없는 순수함처럼,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간직된 소중한 것들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빛을 잃지 않는다.
그 아이와 함께했던 시간들, 우리의 웃음과 대화, 때로는 진지했던 고민들까지. 이 모든 것이 우주 공간 어딘가에 영원히 남아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벅차오른다. 사랑했던 순간들, 진심으로 나누었던 마음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구례낭자와의 재회를 통해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소중한 인연들을 만나고, 그 안에서 사랑을 확인하며, 그 사랑을 다시 세상으로 전해주는 일이라는 것을. 매 순간을 깨어있는 마음으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따뜻함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것을.
가뭄에 내리는 단비가 메마른 대지에 생명을 불어넣듯, 이런 만남은 우리 삶에 새로운 활력을 선사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삶 속에는 이런 ‘구례낭자’가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떠올리며, 사랑도 아름다운 마음도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을 믿으며 오늘도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해본다.